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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 함께 정치를 논하다: 명대 경연정치의 변천과 그 의의(양장)

군신, 함께 정치를 논하다: 명대 경연정치의 변천과 그 의의(양장)

기본 정보
상품명 군신, 함께 정치를 논하다: 명대 경연정치의 변천과 그 의의(양장)
정가 28,000원
판매가 28,000원
적립금 1,400원
출판사 혜안
저자 윤정분
출간일 2018-05-15
주문수량 수량증가수량감소
쪽수 | 무게 | 크기 364쪽 | 660g | 161*234*24mm
ISBN 9788984946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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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경연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보는 중국 명나라의 흥망성쇠!

이 책에 담긴 열 편의 논고는 약 15년 세월에 걸쳐 저자 고(故) 윤정분 교수가 전념했던 명대 경연에 관한 연구들이다. 1984년부터 덕성여대에 재직하면서, 중국근세사 특히 명대(明代) 역사를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강의해왔던 윤정분 교수는 2017년 12월 31일 불의의 사고로 말미암아 영면(永眠)하였다. 이 책은 윤 교수의 제자들이 스승이 생전에 마지막까지 천착했던 명대 경연(經筵)에 관한 글들을 모아 담기로 뜻을 같이 하고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저자의 경연 연구는 중국, 그리고 조선과 같이 유교 이념에 기반을 둔 체제에서 이상적인 정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서 출발하였다. 경연이란 전통 유교국가에서 성학 교육과 정사 협의를 통해 군주의 사적 권력인 ‘가업으로서의 천하(家天下)’에서 ‘공천하(公天下)’를 실현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이며, 사대부들이 추구하는 정치의 이상이기도 하였다. 바른 학문을 숭상하고 이를 통치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하는 군주가 빼어난 성취와 그에 걸맞은 인품을 구비한 신료들과 평생을 두고 학술을 토론하고 배우며 정치를 논의하는 경연이라는 장은 아마도 유교 이념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명대 경연의 역사는 물론 녹녹하지 않았다. 정치의 중심기구로 부상한 내각은 황제 개인의 정치·문학적 자문기구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황제의 일상을 돌보는 환관들과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황권과 신권의 균형에 의한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공천하’의 이상은 일시적으로 모습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제도로서 정착되기는 어려웠다.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혹은 잦은 일탈로 정사에 소홀한 황제에 대해 신권이 견제권을 행사하며 공치를 펼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았다. 문인 엘리트가 주축이 된 신료들 역시 부정부패나 파벌정치의 폐단으로 흐르기 일쑤였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시행한 초기 경사(經史) 강론은 유교주의 통치이념을 표방하는 것과 함께 이를 실현하는 방안으로서, 황실에 대한 교화(敎化)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경사 강론의 실제적 운영방법을 보면, 주원장이 시행한 경사 강론은 황제 자신의 통치 방향이나 방안, 이에 대한 구상을 배석한 강관이나 대신에게 일방적으로 설파함으로써 황제의 주도권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이렇게 유교주의 통치이념에 입각한 정사 협의의 실현과 이에 의한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대 경연제도는 단지 교육 기능으로만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고 군신간의 정사 협의, 즉 유교적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은 제대로 달성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황제의 사적 권력은 어디까지나 성학 교육을 통한 수양이라는 황제 개인의 자율성에만 의존하는 형태로 제약될 뿐이었다.
영락제 연간(1403~1424)의 경연은 북경 천도와 관련하여 ‘감국(監國)’ 등 실무적 황저(皇儲) 교육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후계자 양성에 그 주요 목적이 있었다. 황태자와 황태손에 대한 경연과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황위의 찬탈을 통해 황위에 등극했다는 영락제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수성(守成)의 군주 역할을 남달리 강조했던 정국 구상과 운영이 크게 작용했다.
2부에서는 명대 정치구조의 변화에 따른 경연과의 관계 변화에 대하여 서술한다.
정통(正統) 연간(1436~1449)의 경연은 명분뿐인 제도로만 유지될 뿐이고, 경사 강론에서 이루어진 각신(閣臣)들의 ‘참예기무(參預機務)’를 통한 황권 견제나 정사협의체의 기능은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전대와는 달리 경연 교재나 경연개최 시기 등 경연 개최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생략된 채, 경연 담당관의 임명 등 단순히 제도적인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종대에 이루어진 경사 강론의 제도화는 그 이후 황실 교육은 물론이고, 군신의 정사 협의와 정국을 운영함에 있어서 중요한 모델로 정형화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후 황실의 경사 강론은 황실 교육과 군신 간의 정사 협의 등 그 기능과 역할을 어디에다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졌고, 이에 따른 정국운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는 황제가 정사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주요 국사는 대부분 황제 측근인 태감을 비롯한 환관에 의해 농단되는 등 정국은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처럼 군신간의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언로의 개방과 민정의 상달, 경연 개최와 성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조정 대신 및 과도관들의 상소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결국 성학 교육과 군신간의 정사 협의, 황권 견제 등 종전의 경연제도 기능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유교적 통치이념에 입각한 이상 정치의 상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내각을 대신하여 언관인 과도관들에 의한 공론 정치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홍치(弘治) 연간(1488~1505)은 봉건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제반 사회의 변화상을 대변하는 사대부들의 공론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신 간의 정치적 공론장인 경연에서는 이러한 당시의 공론정치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조종지제(祖宗之制)’의 황제 독재 체제로 복귀함으로써 언로의 장을 제약하였다. 당시 경연에서는 군신공치의 ‘공천하(公天下)’의 실현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 채, 황제의 사적 권력인 ‘가천하(家天下)’로 회귀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상을 수용하거나 발전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였다. 이러한 홍치 연간의 경연제도를 통해 볼 때, 이른바 ‘홍치중흥’이란 평가는 그 타당성에 있어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
마지막 3부는 명나라 체제의 위기와 군신공치의 쇠퇴 과정을 다루었다.
명 건국 후 약 150년이 지난 정덕(正德) 연간(1506~1521)은 명대 역사에서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제반 모순이 첨예하게 표출되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환관 세력의 전횡은, 이때에 이르러 유근(劉瑾)을 비롯한 ‘8호(虎)’와 ‘표방(豹房)’ 정치에서 극에 달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토목의 변(土木之變)’ 이래 몽고의 지속적 국경 침략, 기상 이변으로 인한 북방의 극심한 가뭄, 그리고 남방의 홍수 등은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로써 농민의 유민화와 도시화 등 농촌분해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처럼 제반 모순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된 상황에서 명 왕조 초기의 ‘조종지제’와 경연제도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정덕 8년 이후에는 황제가 표방에 유숙하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황제는 정덕 8년 4월에 열린 경연에 잠시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강독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 이후로는 정덕 9년 두 차례, 그리고 정덕 10년 한 차례에 걸쳐 경연 개최를 명하기도 했지만, 특히 정덕 12년 이후로는 황제가 북방과 남방 순행을 강행함으로써 월강과 일강은 당연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가정(嘉靖) 연간(1522~1528)은 가정제의 독단적인 정국운영으로 황극(皇極)을 운운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군주로까지 언급되었다. 이 같은 정국 상황에서, 경연은 일강에 병합되어 그 개최여부와 운영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강론과 교재선택조차도 황제와 일강관에 포진된 의례파에 의해 자의적이고도 파행적인 형태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군신공치를 이상으로 하는 조종지제의 원형은 이미 와해됨으로써, 군신간의 정사 협의나 황제의 사적 권력에 대한 제약이라는 경연의 취지는 더 이상 발휘될 수 없었고, 경연은 단지 황제의 일방적 요구에 따라 이에 응하는 문학적 자문 기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볼 때 가정 연간의 경연은 대례의 정국 속에서 유교적 정치 이념을 이상으로 삼는 조종지제의 경연이 붕괴되었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명 왕조 개창 이래 지속되었던 예제적(禮制的) 국가질서 또한 근본적으로 동요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어진 융경(隆慶) 연간(1567~1572)의 경연은 각신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각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된 ‘내각 파동(閣潮)’을 빈번하게 거치면서, 국초에 제정된 경연의 당초 취지와 목적을 실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융경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향락에만 탐닉하고 있었던 황제 개인의 문제점과 함께, 이로 인해 야기되는 내각 중심의 정국운영, 특히 내각수보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정 운영 시스템상의 문제가 그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융경 연간에는 황제의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하는 공백 상태에서, 정국운영의 권한은 자연히 내각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정국운영의 주도권이 융경제의 친위 세력에 의해 장악되면서, 언관을 비롯한 비판세력이 기대하는 유교적 이념에 따른 ‘조종지제’의 복원은 좌절되었다. 게다가 융경 4년 이후 정국은 주로 고공(高拱)과 장거정(張居正)을 중심으로 하는 황제 친위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에서, 내각의 내분과 갈등 또한 정치적 이념이나 명분, 정책방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기보다는 다분히 권력 투쟁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 시스템의 붕괴인 동시에, 내각수보를 비롯한 내각 중심의 정국운영 시스템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경연은 의례적 명분조차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에서 볼 때, 저자가 보기에 명대의 경연제도는 15세기 이후 계속 조종지제(祖宗之制)가 형해화 되면서 16세기 후반 융경 연간에 이르러서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제왕학의 학습과 정사 협의라는 기능과 그 의미조차 근본적으로 붕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연의 영향력은 성학교육을 통한 수양이라는 황제 개인의 자율성에만 의존하는 형태였고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 권력의 자의성에 의존하는 군주권의 독주는 명대 정치사의 특징이자 명 왕조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명대의 경연은 군신 간의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경연이 이상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던 조선시대의 경연제도와는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윤정분 교수의 연구는 명조 멸망을 100여 년 앞둔 1572년까지 진행된 채, 뜨밖의 비보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15년 계속된 연구의 결실을 거두고 유종의 미로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새삼 안타깝기만 하다.

[목차]
첫머리에

1부 건국 초기 경연의 시행과 정국운영

明代 經筵制度와 政局運營의 추이-洪武(1368~1398)~弘治 年間(1488~1505)을 중심으로-
Ⅰ. 서론
Ⅱ. 洪武(1368~1398)·永樂 年間(1403~1424)의 經史 講論과 황제 독재 체제의 정립
Ⅲ. 宣德(1426~1435)·正統(1436~1449)·天順年間(1457~1464)의 내각제와 경연의 제도화
Ⅳ. 成化(1465~1487)·弘治 年間(1488~1505)의 경연제도와 공론 정치
Ⅴ. 결론

明初 經筵제도의 배경과 그 특징-朱元璋의 經史 강론과 군주권 강화를 중심으로-
Ⅰ. 서론
Ⅱ. 朱元璋의 유교주의 표방과 제도화
Ⅲ. 經史 講論과 政事 자문
Ⅳ. 주원장의 통치책과 군주권 강화
Ⅴ. 결론

永樂帝(1403~1422)의 經筵 운영과 그 특징-북경 천도 추진과 관련하여-
Ⅰ. 서론
Ⅱ. 황제 經筵과 영락제의 崇儒정책
Ⅲ. 영락제의 北京 遷都 추진과 皇儲 교육
Ⅳ. 결론

2부 명대 정치 구조의 변화와 경연

宣德 年間(1426~1435)의 經史 講論과 그 특징-宣德 初 현안문제와 宣德帝의 정국운영과 관련하여-
Ⅰ. 서론
Ⅱ. 卽位 初의 현안과 經史 講論의 시행
Ⅲ. 宣德 年間의 經史 講論과 그 내용
Ⅳ. 召對 강화와 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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